단삼 2025-04-02 07:49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김보영 작가의 SF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 『미래로 가는 사람들』이 출간되었다.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이번에 새로 선보이는 신작이고 다른 두 작품은 기 출간작의 개정판이다. 세 작품은 모두 우주여행을 주제로 담고 있으며 무한한 우주를 항해하는 동안 변화하는 시간과 공간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가슴 따뜻한 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두 남녀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는 서간문 형식의 소설이다.
단삼 2025-04-02 10:16
P 11
그런데 하루쯤 지나니까 시시하더라. 우주에 나오면 별을 잔뜩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유리 너머로 보니까 뭐 보이는 게 있어야지. 밤에 집 안에 있으면 바깥 안 보이잖아. 우주는 늘 밤이고. 하지만 괜찮아. 겨우 두 달인걸.
뱃사람들은 이 항로를 '가디림의 궤도'라고 불러. 태양을 중심으로 나선을 그리며 돌다가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지.
단삼 2025-04-02 10:29
P 39
아우성과 비명 속에서 시간은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갔고, 또 때로는 보고 들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갔어. 나는 도망치고 숨었고 사람을 밀치고 발로 찼어. 정신이 든 뒤에도 정신이 없었어. 조용해진 뒤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기어 나왔는데 사방 천지가 시체였어.
다치지 않은 사람은 다친 사람을 도와주라는 말에 따라 유령처럼 쓸려 다녔어. 수분 크림을 찾던 아주머니는 내가 붕대를 감는 사이에 죽었어. 붕대 감는 내내 아우성이었어. 조용해지고 보니 죽어 있더라고.
단삼 2025-04-02 18:13
P 55
당신은 오지 않았어.
그런데 왠지 슬프지 않더라. 기쁘지도 않았지만.
그저 담담했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졌어.
단삼 2025-04-02 18:15
P 56
그런 뒤에 나는 떠났어.
사실 떠날 이유는 없었어. 더 이상 미래로 갈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남아서 뭘 해야 할 지도 알 수가 없었어. 오염이 사라지고 사람이 살 만해진 미래로 가자고 생각했어. 그 뒤는 생각하지 않았어. 생각할 만한 마음이 없었어.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어. 이 모든 것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당신을 포함해서.
단삼 2025-04-02 18:17
P 59
왜 살았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생각해 보면 왜 죽으려 했는지도 모르겠더라. 아니, 더 생각해 보니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는 거더라고. 그 도시처럼. 뭔가를 해야만 살 수 있는 거야. 의지를 갖고. 지치지 않고.
단삼 2025-04-06 15:10
P 78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오래전에 어느 별에 정착해 좋은 사람 만나 아들딸 열쯤 낳고, 가족들의 축복 속에 한 생을 마감했다 해도. 혹은 어느 빛의 궤도에 올라, 지구가 회복되기를 기다리며 아득한 여행을 하고 있다 해도. 어쩌면 아득한 성계 너머에서 이제 막 배에서 내리며, 어린 날의 가벼운 추억거리처럼 나를 회상하고 있다고 해도.
단삼 2025-04-06 15:12
P 80
내가 여기에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자제하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살린 거야. 당신이 지금 어느 시대에 있든, 이미 죽었든, 살았든, 무한의 별 무리를 여행하고 있든.
단삼 2025-04-06 15:19
P 102
제단 뒤 벽에 색 바랜 종이가 겹겹이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어. 원래는 색지였을 것 같았지만 모두 회색이었어. 거기에 물먹은 글씨로 비슷한 말이 잔뜩 적혀 있었어.
단삼 2025-04-06 15:21
P 108
기다리고 있어
내가 여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