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삼 2025-06-04 17:12
바깥은 여름
소설집의 문을 여는 작품 《입동》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부서진 일상을 따라가며 독자로 하여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다가도, 그 고통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게 만든다. 십대 무리와 노인과의 실랑이 끝에 노인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 후 그 사건의 목격자인 ‘나’의 아들 ‘재이’가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편견에 둘러싸이고, 그런 편견 사이에서 천진하다고만 생각한 아이에게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가리는 손》 등의 작품을 통해 가까이 있던 누군가를 잃거나 어떤 시간을 영영 빼앗기는 등 상실을 맞닥뜨린 인물들, 친숙한 상대에게서 뜻밖의 표정을 읽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된다.

언젠가 출연한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소재를 이야깃거리로 소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이야기했던 저자의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곳곳에 묻어나는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들은 어느 때보다 안과 밖의 시차가 벌어져있음을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던 최근 삼사 년간 집중적으로 쓰였는데, 그 혼란의 시기를 비켜가지 않고 천천히 걸어 나가고자 했던 저자의 다짐을 엿볼 수 있다.
수록작 가운데 한 편을 표제작으로 삼는 통상적인 관행 대신,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번 소설집에서 저자는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버린 누군가의 얼어붙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향해 살며시 손을 내민다. 무언가를 잃은 뒤 어찌할 바 모른 채, 어디로 가야 하느냐고, 어디로 갈 수 있느냐고 묻는 인물들의 막막한 상황들을 끌어안으며 써내려간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다.
단삼 2025-06-10 13:23
P 21

지난봄,우리는 영우를 잃었다. 영우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서 숨졌다. 오십이 개월. 봄이랄까 여름이란 걸, 가을 또는 겨울이란 걸 다섯 번도 채 보지 못하고였다.가끔은 열불이 날 만큼 말을 안 듣고 말썽을 피웠지만 딱 그 또래만큼 그랬던, 그런 건 어디서 배웠는지 제 부모를 안을 때 고사리 같은 손으로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던, 이제 다시는 안아볼 수도, 만져볼 수도, 재울 수도, 달랠 수도, 입맞출 수도 없는 아이였다. 화장터에서 영우를 보내며 아내는 '잘 가'라 않고 '잘 자'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양 손으로 사진을 매만지며 그랬다.
단삼 2025-06-10 13:33
P 36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에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뮬라.
그러곤 내가 아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